며칠 전 열린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한일전 결승전, 다들 보셨나요? 저 역시 TV 앞에서 주먹을 꽉 쥐고 숨죽이며 응원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축구가 일본을 상대로 번번이 고전했던 터라, 이번 결승전만큼은 제발 꼭 이겨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치열한 몸싸움 끝에 끝내 올라온 크로스, 그리고 골망을 가른 결승 골. 마침내 1:0으로 경기가 끝나고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뻤습니다. 밤늦게까지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그라운드에서 쥐가 나도록 뛰어준 젊은 선수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뜨거웠던 감동이 차가운 씁쓸함으로 바뀌는 데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뉴스에 나온 선수들의 인터뷰와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메달이나 트로피는 솔직히 생각도 안 했고, 오직 군 면제만 생각하고 뛰었습니다." 이미 국가대표로 월드컵까지 다녀온 주장은 "군대 안갑니다."라며 미소를 지었고, 어린 나이에 유럽 명문 팀으로 이적한 유망주는 군 제대를 상징하는 개구리 모자를 쓰고 장난스러운 사진을 찍어 올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마음 한구석이 쿵 내려앉으며 말로 표현하기 힘든 허탈함과 배신감이 밀려왔습니다.
특혜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빚'입니다
스물 살 안팎의 젊은 프로 선수들에게 군대 문제가 얼마나 무겁고 절박한 현실인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한창 전성기를 달려야 할 나이에 1년 반 동안 운동을 멈춰야 한다는 건, 수십억 원의 연봉이나 유럽 진출의 기회가 날아갈 수도 있는 엄청난 일이니까요. 솔직한 마음으로 군 면제가 가장 간절했을 것이라는 점은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인터뷰를 보며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팠던 진짜 이유는, "그들이 얻은 엄청난 혜택이 도대체 누구 덕분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생각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주어지는 병역 혜택은, 결코 개인의 뛰어난 재주 하나로만 얻어낸 전리품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추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철책을 지키고, 힘든 훈련을 묵묵히 버텨내고 있는 수많은 평범한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군대에 보낸 아들이 다치지는 않을까 가슴 졸이며 기도하는 부모님들이 계십니다.
그 수많은 사람의 땀과 희생, 그리고 "나라를 빛내주었으니 기회를 주자"는 온 국민의 따뜻한 양보와 배려가 있었기에 그 특별한 혜택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국방의 의무를 마치 '운 좋게 피한 재수 없는 일' 취급하며 장난스럽게 웃어넘기는 모습은, 지금 묵묵히 청춘을 바치고 있는 수많은 군인과 그 가족들을 순식간에 바보로 만들어버린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태극마크가 '군 면제 티켓'이 되어버릴 때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다는 건, 남들보다 공을 잘 찬다는 기술을 뽐내는 자리가 아닙니다. 수많은 국민의 응원과 나라를 대표한다는 무거운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는 일입니다.
예전 선배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에 나섰을 때 흘렸던 눈물에는 항상 '나라를 위해 뛴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진심 어린 헌신을 보았기에 국민들도 아낌없이 감동하며 응원했던 것이고, 그 고마움의 선물로 병역 혜택을 안겨준 것입니다. 헌신이 먼저였고, 혜택은 그 뒤를 따라온 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본 모습은 앞뒤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태극마크라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그저 '내 인생 편해지기 위한 군 면제 티켓'으로 쓰이고 버려진 느낌이었습니다. 국가를 대표했다는 자부심 대신 "군대 안 가게 되어 살았다"는 사소한 안도감만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가벼움 앞에서, 함께 목이 쉬어라 응원했던 사람들은 깊은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짜 어른이 마음속에 품어야 할 생각, '염치'
축구 선수들의 철없는 행동을 보며 마음이 쓰렸던 이유는, 사실 우리 일상과 사회 속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자주 마주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주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배려와 양보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고, 편안한 자리에 서곤 합니다. 직장에서 동료가 궂은일을 대신 맡아주었기 때문에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하고, 부모님이 묵묵히 희생해 주셨기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더 편하게 내 꿈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염치(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은혜를 입었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좋은 것들이 온전히 '내 잘난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묵묵히 버텨준 덕분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겸손함입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젊은 선수들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건 개구리 모자를 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금도 나라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는 또래 군인 친구들에게 이 고마움을 돌립니다."라는 짧지만 진심 어린 한마디였습니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저절로 존경받는 멋진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누리는 편리함과 혜택 뒤에 숨겨진 다른 사람들의 수고를 헤아릴 줄 아는 마음, 그 조용한 염치가 살아있을 때 우리의 삶도 비로소 품격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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